호시탐탐 인류를 위협하는

2020. 6. 11. 15:35바이러스

 1997년 5월, 홍콩에서 독감이 발생하여 18명이 감염되고 이 중 6명이 사망했다. 이 감염자들은 재래시장이나 양계장에서 닭과 직간접적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전 세계는 이 독감이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H5 N1'에 의해서 발생했다는 사실로 충격에 휩싸였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중국 광둥 지역에 둘러싸인 홍콩은 1957년 아시아 독감, 1968년 홍콩 독감 등 역사적으로 판데믹을 일으킨 인플루엔자를 전 세계로 퍼트린 중요한 진원지 Epicenter 역할을 해왔다. 그러한 과거의 어두운 전력으로 인해, 홍콩 독감이 과거의 독감 판데믹 데자뷔를 반복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만들었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홍콩에서 독감 사망의 원인이 조류 인플루엔자 H5 N1이었고, 감염된 가금류로부터 사람으로 직접 전염되어 독감으로 사람이 사망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전에 출현한 판데믹 인플루엔자는 조류 바이러스에서 유래하기는 했지만, 주로 돼지 등 중간 매개체 동물을 경유하면서 사람들 사이에 전염이 잘되는 변종 바이러스가 출현하여 판데믹을 일으키는 방식이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조류 바이러스가 돼지의 몸속에서 돼지나 사람 바이러스와 뒤섞여 사람들 사이에 전염이 가능한 신종 바이러스가 만들어진 다음, 사람에게 유행을 일으키는 판데믹으로 발전하는게 정설이었다.

 그 이전에도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특히 H7형이 돼지와 같은 중간 믹서기 포유동물을 경유하지 않고, 닭과의 직접 접촉을 통해 사람이 감염되는 사례는 있었다. 하지만 결막염 등 약하게 앓다가 자연 치유되는, 그리고 발병 지역을 넘어서는 확산되지 않는 '찻잔 속의 태풍' 정도였다. 홍콩 H5 N1 인체감염 사례는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직접 감염되어 사망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더욱이 그 이전까지는 사람이 감염되는 인플루엔자는 H1, H2, H3형 타입의 바이러스였지만, 이 바이러스는 H5형 바이러스였다. 그래서 그 당시 홍콩에서의 H5 N1 바이러스 인체감염 사례는 과거의 경험을 뛰어넘는 예외적인 사례, 즉 블랙스완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홍콩 보건당국이 감염 및 위험 조류를 대량 폐기하는 등 강력한 통제조치를 실시하면서, 이 역시 찻잔 속의 태풍처럼 잠잠해졌다. 그렇게 H5 N1 바이러스가 일으킨 충격은 기억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자 다시 상황이 바뀌었다. 2003년 말부터 가금조류에서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8개국 이상에서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가 크게 유행했다. 이 바이러스는 1997년 홍콩 H5 N1 바이러스가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여 진화하며, 바이러스 항원 구조가 크게 다른 변종 바이러스로 탈바꿈해 있었다. H5 N1  바이러스가 닭, 오리 등의 가금 조류 내에서 유행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북부 청해 Qinghai 호수에서 집단 월동하던 철새 집단에 퍼져서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으로 확산됐다. 이때부터 일부 동남아시아 국가에서는 H5 N1 바이러스의 인체감염 사례들도 보고되기 시작했다. 2004년 2월 12일까지 세계 보건기구에 공식 집계된 H5 N1 인체 감염 건수는 34건이 발생하여 23명이 사망했다. 이 중 베트남과 태국에서 25건이 보고되었으며, 19명이 사망했다. 엄청난 치사율이었다. 이들 인체감염 사례는 사람 간 전염보다는 모두 감염 닭과 밀접하게 접촉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일부 인플루엔자 전문가들은 이 바이러스가 향후 사람에게 적응하여 판데믹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는 경고음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과 동남아 상재 지역 가금류 사이에서 H5 N1 바이러스를 통제하는 것이 한계에 도달했다. 가금류 사이에서의 전염병 확산을 낮출 방법이 필요했는데 인체감염의 위험을 높이는 변종 바이러스 출현을 저지하고자 2005년부터 가금류에 대한 H5 N1 백신을 접종하기 시작했다.

 2006년 5월,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하나의 사건은 판데믹 가능성 우려에 불을 지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북부 지역 쿠부 셈빌랑 Kubu Sembilang 마을에 사는 37살의 여성 A는 시장에서 생닭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4월 하순 여성 A는 몸에 열이 나면서 심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기침은 멈출 줄 몰랐다. 그녀는 심한 독감을 앓으면서도 15살, 17살 두 아들을 데리고 4월 29일 20명의 친척들이 모이는 가족 잔치에도 참석했다. 그러나 가족 모임 동안 몸살이 너무 심했던 여성 A는 도저히 집안 음식을 장만하는 것을 도와줄 수 없어서 누워있어야 했다. 그날 밤 두 아들과, 옆 동네 카 반지 헤 Kabanjahe 마을에 살던 남동생을 포함해서 9명이 작은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병세가 계속 악화되어 결국 5월 5일 사망했다. 그 일이 있은 지 3주가 지나자, 그녀와 같은 방에서 잤던 두 아들과 남동생도 심한 독감을 앓기 시작했다. 남동생은 다행히도 독감에서 회복했지만, 여성 A의 사랑하는 두 아들은 결국 사망했다.

 쿠부 셈빌랑 마을에는 11명의 가족 친지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바로 옆집에 살고 있던 29살의 여동생 B는 사망하기 전까지 아픈 언니 A를 돌보았다. 여동생 B뿐만 아니라 여동생의 2살 배기 딸도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다가 결국 사망했다. 그 마을에 살던 여성 A의 조카는 여성 A의 또 다른 옆집에 살고 있었다. 그 조카도 4월 29일 가족 모임에 참석했고, 그 이후로도 수시로 옆집인 숙모 집을 들락거렸다. 그 조카도 역시 독감에 걸렸고 그 조카의 아버지는 아들을 간호하다가 본인도 독감에 걸렸다. 이들도 독감을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사망했다. 그러나 독감에 걸린 남편을 간호하던 부인은 감염 노출 위험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다행히 독감에 걸리지 않았다. 최초 사망자 A는 원인도 모른 채 사망했지만, 인도네시아 보건당국은 나머지 사망자에게서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H5 N1에 걸린 사실을 확인했다. 이 사례는 대가족 사이에 사람과 사람 간 H5 N1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사실을 말해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와 같은 가족 구성원 사이에 환자를 돌보다 감염되는 사례는 인도네이사 뿐만 아니라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에서도 발생했다. 고양이, 호랑이, 표범, 개 등 여러 포유 동물계에서도 치명적 사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치 폭풍이 일기 직전과 같은 공포가 세계에 엄습했다. 심지어 사람 간 전염이 용이해지는 바이러스 출현은 시간문제인 것만 같았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H5 N1 인플루엔자 판데믹을 대비해서 백신을 개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보였고, H5 N1 인플루엔자 인체백신 개발이 시작되었다. 심지어 판데믹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여, 일부 국가에서는 예방 백신으로 사용할 수 있는 H5 N1 바이러스 항원을 비축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전염병 학자들이 우려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세계보건기구는 H5 N1 바이러스 인체감염을 여전히 전염병 경보 단계 3으로 유지하고 있다. 수억 명이 한 번쯤은 걸렸을 것으로 보이는 신종플루와 달리, 긴밀하고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서만 제한적으로 전염이 일어났다. 이러한 제한된 사람 간 전염은 중국에서 감염 닭과의 접촉을 통해 주로 발생한 조류 인플루엔자 H7N9 인체감염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H5 N1 바이러스는 지난 10여 년 동안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가금류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여 인체 노출 위험이 상존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4년까지 638명 감염되고 이 중 379명이 사망하여 치사율 59%를 기록했다. 이런 것으로 보아, 돼지를 통해 인체감염이 용이하도록 사람에게 적응된 판데믹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들과 달리, 인체감염이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아마도 사람들 사이에 적응되지 않은, 즉 사람 간 전염성을 가지는 항원 구조를 아직까지 획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아 지역 등에서 이 바이러스에 대한 유행 감시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이들 조류 바이러스가 돼지 등 믹서기 동물을 통해 돼지나 사람 바이러스와 뒤섞여 신종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로 돌변할 가능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활한 바이러스, 아직까지는 믿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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