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이 찾은 아틀란티스

2020. 6. 13. 15:18미스터리

 현재 많은 학자에게 지지받고 있는 가설은 프로스트가 1909년에 <타임>에 처음 발표한 내용이다. 이 글은 라스가 1969년에 쓴 <재발견된 아틀란티스 대륙>이라는 기사에서 다시 언급됐다. 그들의 주장은 크레타 섬이 아틀란티스라는 것이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크레타 섬이라는 프로스트의 가설은 다른 가설보다 자료와 증거가 많다. 그럼에도 이 가설이 근래까지 큰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은 플라톤이 말한 "단 하룻 낮과 밤사이"에 아틀란티스 대륙이 갑자기 소멸했다는 이야기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크레타 섬이 아틀란티스 대륙이라면 "서쪽에 있었던 섬" 이 아니다. 크레타 섬은 이집트에서는 서쪽에 있지만 그리스에서는 동쪽에 있는 섬이다. 이집트 사제가 이집트인인 까닭에 서쪽이라고 말했다고 수긍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지만 이 방향을 놓고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아틀란티스 대륙에 대해 결론 내리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고고학자나 과학자들이 모두 플라톤이 말하는 단어 하나 하나에 집착한 것은 아니다. 프로스트의 가설을 강력히 지지하는 증거가 마침내 나타났기 때문이다. 기원전 17세기에 크레타에서 160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산토리니 섬에서 갑자기 거대한 화산이 폭발하면서 미노아 문명의 중심지인 크레타 섬이 황폐해졌다는 증거를 고고학자 마리나 토스가 찾아냈다. 화산 폭발의 연대를 과거에는 기원전 1477년으로 추정했으나 현재는 기원전 1628년으로 본다.

 마리노트스는 산토리니 섬이 플라톤이 말한 아틀란티스 대륙이 틀림없다고 단정하고 크레타 섬 주위를 고집스럽게 뒤진 결과 드디어 1967년에 산토리니 섬 남쪽에서 아크로 티리라는 고대 함대 정박소를 찾아냈다. 그 뒤로 1미터에 달하는 화산재에 덮인 마을도 발굴했는데 2층 주택, 3층 주택, 창문, 방, 계단, 운하, 도로, 궁전 등이 거의 원형 그대로 파묻혀 있었다.

 놀라운 것은 건물 대부분에서 벽화가 발견됐다는 점이다. 그런데 벽화는 이집트 벽화와 완전히 달랐다. 이집트 벽화는 파라오를 더 신격화하고 영웅으로 부각하기 위해 전투 장면이나 사후 세계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그러나 크레타 벽화는 꽃 따는 아이, 놀이하는 어린이 등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상생활을 주로 담았다.

 이것은 크레타가 다른 지역과 달리 암울하고 딱딱한 전제 국가가 아니라 문명화된 사회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층 가옥에는 냉,온수가 공급되는 배관 시설이 있고 수세식 변소가 설치됐다. 더욱 놀라운 것은 크레타 문명이 전 세계적인 풍물을 도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집트 유물은 물론 원숭이 그림 등도 발견된다. 이미 크레타가 아프리카와 교류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크레타가 원시사회가 아니라 당대에 지중해 전 지역을 아우르는 세계적인 국가였음을 의미한다. 학자들은 유럽의 최초 문명이 크레타에서 일어났다는 주장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화산 폭발에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은 크레타 문명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섬인 크레타 였다. 폭발에 따른 진동이 크레타에 있는 건물을 파괴했고 거리는 화재로 뒤덮였다. 엄청난 해일이 북쪽 연안을 강타했으며 지진도 일어났다. 고고학자들이 모두 미노아 문명이 종말을 맞은 가장 큰 이유로 산토리니 섬의 화산 폭발을 들지는 않더라도(또 다른 학설은 그리스인의 공격으로 멸망했다는 것이다) 이 화산 폭발이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는다.

 이집트 인들은 지중해 조그마한 섬 하나가 바닷속에 침몰해버리고 그 여파로 그들이 잘 아는 크레타라는 강력한 국가가 완전히 파괴됐음을 알게 됐다. 이집트인들은 지중해를 활보하던 크레타인들이 화산 폭발 이후 갑작스럽게 출입을 끊자 이보다 800년 뒤에 이집트를 방문한 솔론에게 크레타 섬을 아틀란티스 대륙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솔론은 크레타와 이집트인들이 부르는 케프티오우keftiou 가 동일한 지명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이집트인들이 서쪽이라고 한 말도 당시 그리스인들이 머나먼 서쪽을 뜻하는 지브롤터 해협의 서쪽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고대 그리스인들은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술하지 않고 신화로 설명했다. 크레타 멸망이 이미 1,000여 년이 지난 때였으므로 크레타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없자 이를 과장해 지브롤터 해협 서쪽으로 설명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듯 1960년 그리스의 지진학자인 가라노프 우르스는 플라톤이 기록한 아틀란티스 대륙에 관한 열아홉 가지 사실은 대부분 크레타 섬과 연관 지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도로시 비탈리아노는 열아홉 가지 중 여섯 가지는 완전히 일치하고 여덟 가지는 일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이 말한 아틀란티스 대륙과 크레타는 믿이 어려울 만큼 유사하다. 특히 미노아 문명은 플라톤이 언급한 매우 세련된 아틀란티스에 부합할 만큼 상당한 발전한 문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산토리니 섬의 지형도 플라톤이 기술한 아틀란티스 지형과 합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티마이오스>에서 플라톤은 여행자들이 "사라진 대륙 후면에서 출발해 대륙 전면에 있는 다른 섬에 도달할 수 있었다."라고 기술했는데 이집트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 말은 크레타와 사이 클라드 군도 그리고 그리스 대륙 사이를 말한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황소를 제물로 바칠 때 금속을 사용하지 않고 매듭과 몽둥이만을 사용해 죽였다는 기록이다. 당시 크레타인들은 무기 없이 황소와 싸우는 운동을 즐겼다. 커다란 황소가 질풍같이 돌진하는 정면에 떡 버티고 섰다가 쇠뿔에 받히는 순간에 쇠뿔을 휘어잡고 공중회전을 해 황소 등에 올라타는 경기다. 이 경기는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황소를 상대로 하는 것이므로 조그마한 실수도 허용되지 않았다. 특히 그들의 무기는 오직 양팔과 번개처럼 빠른 눈, 민첩성과 용기뿐이었다.

 크레타에서 발견된 투우사 프레스코화에는 황소 한마리와 선수 세 명(두 명은 여자)이 그려져 있었다. 힘이 넘치는 황소가 맹렬하게 돌진하고 허리에 짧은 요포를 두르고 양말만 신었을 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한 소녀가 쇠뿔을 꽉 잡고 있으며 소년이 황소 등에서 공중제비를 돌고 있다. 그림에 여자 선수가 등장하는 것은 황소 타기가 완력이 중요한 스포츠가 아니라 스피드가 중요하며 운동신경이 뛰어나야 하는 스포츠임을 의미한다.

 이 경기는 잘못하면 사람이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어떤 인장 반지에는 소 등에 뛰어오르다 떨어져 소 발굽에 짓밟힐 위기에 놓인 사람들이 그려져 있고 한 꽃병에는 쇠뿔이 여자 선수의 등을 찔러 배를 뚫고 나온 장면이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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