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격하는 다지역 기원설

쿤의 주장과 달리 아프리카 기원설을 옹호하는 논문들이 이어지자 다지역 기원설 지지자들도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고고학적인 증거였다. 아프리카 기원설에 가장 큰 반론을 제기하며 다지역 기원설을 적극 옹호한 쪽은 화석 인류학자들이었다. 특히 중국과 북한, 한국 등 극동 지역에서 다지역 기원설을 강력히 옹호한다. 아시아에서 발견되는 고고학적 증거가 아프리카 기원설을 격파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선 60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베이징원인의 후두골에서 작은 화산형 돌기가 발견됐는데 이것은 현 황색인종(몽골로이드)의 특징과 같다. 게다가 숟가락처럼 생긴 상문치가 나왔는데 이 점도 몽골로이드의 특징 중 하나다. 이는 베이징원인이 몽골로이드의 선조라는 증거로 해석됐다.

베이징원인이 발견된 바로 그 자리에서 신인 또는 진인이라고 불리는 산딩둥인이 발견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대력 2만 년 전 구석기 후대에 속하는 산딩둥인은 입술이 원인(호모 에렉투스)이나 고인(호모 사피엔스) 보다 더 들어가 있고 눈두덩이도 편편해 현대인과 매우 비슷한 모습이었다. 한마디로 다지역 기원설의 강력한 증거인 셈이다.

 

1989년과 1990년에는 중국 후베이성 윈현에서 윈현인 이라 불리는 100만 년 전 고인이 발견됐다. 윈현인은 베이징원인보다 무려 40만 년을 더 올라간다. 곧이어 또 다른 두개골이 완전한 모습으로 발견되자 영국의 <타임스>는 "현대 인간의 조상이 가까운 과거에 아프리카에서 출발했다는 아프리카 기원설이 위태로워졌다"라고 보도했다. 최근 남부 중국에서도 2백만 년 전 초기 인류가 만든 석기가 발견되고 원인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다지역 기원설을 공고히 지지해주는 자료로 제시됐다.

이후에도 다지역 기원설에 관한 연구결과는 잇달아 발표됐다. 2006년 7월 일본 국립 과학박물관 연구팀은 아시아인이 종전 학설보다 45만 년 앞선 18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로 진출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연구팀은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서 발견된 자바 원인의 치아와 턱 화석 100여 개의 특징을 분석해 이 같은 결과를 얻었다. 자바 원인 화석은 치아가 크고 턱이 단단해 180만 년 전 아프리카 원인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갖췄음이 확인됐고, 아프리카 원인의 치아가 진화하면서 작아졌다는 사실 또한 확인됐다. 이 내용은 다지역 기원설을 강력하게 뒷받침했다.

 

한편 1986년 랴오둥 반도 서남쪽, 발해만에서 3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섬에서는 진뉴산인이 발굴되었다. 

진뉴산인은 28만 년 전 여인으로, 20세에서 22세로 추정됐는데 중국 학계는 이 여인을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사피엔스 사이, 즉 초기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는 과도기적 인간으로 설명한다.

중국인들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아프리카 기원설을 반박하는 이유는 동양으로 온 호모 에렉투스의 후손으로 볼 수 있는 베이징원인 등이 단절되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는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네안데르탈인 또는 크로마뇽인이 유럽인의 시조 일지는 모르지만 아프리카에서 나온 이브가 용양인의 선조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석기 문화가 꾸준히 발달해왔다는 증거가 제시됐다. 학자들은 전곡리 유적에서 발굴된 선조들의 연대가 35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전곡리 유적의 연대는 그동안 구석기 중에서도 후기에 해당하는 몇만 년 전으로 설명됐지만 일본 단바라 데쓰 박사는 전곡리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석기가 묻혀 있던 지각이 30만 년 전 지각인 것으로 추정했다.

전곡리에 터전을 잡은 구석기인들이 특별히 주목받는 이유는 중기 구석기시대에 석영을 석재로 사용한 자살-돌 석기 전통이 후기 구석기시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점이 아프리카에서 100여만 년 전에 출발한 호모 에렉투스가 각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진화해나갔다는 다지역 기원설을 뒷받침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로 제시된다. 베링 해 문화권과 알타이 지역 그리고 우리나라의 문화권적 계통성을 되짚어 볼 때 다지역 기원설이 더 큰 힘을 받는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