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배우의 출현

2020. 5. 4. 06:19바이러스

지구 상에서 원시 바이러스가 탄생한 초기, 바이러스는 어떻게 자신들을 유지하면서 생존해왔을까?

원시 바이러스도 오늘날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숙주가 단세포 생명체에 기생하는 순간부터 그들이 서식하는 기간은 그 숙주가 살아있는 동안으로 제한되었을 것이다. 숙주가 죽어버린다면, 바이러스도 그 숙주에서 더 이상 증식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숙주 개체로 옮겨가야 한다. 바이러스가 숙주 개체 간 전염을 통해서 바이러스 생태계를 유지하려면 그들이 서식하는 숙주가 어느 정도 이상 규모의 집단을 형성하고 있어야 하고, 밀접하게 교류하고 잇어야 가능하다.

 

오늘날, 우리의 바닷속에는 1L당 수십억 개의 바이러스가 존재한다. 이와 같은 엄청난 바이러스의 밀집성은 바이러스가 서식하는 숙주, 특히 세균 또한 그만큼 풍부하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지구 생명체가 처음 탄생한 곳도 바다의 세계라고 알려져 있다. 바다에서 원시세포 생명체가 다시 다세포 생명체로 진화했다. 초창기 바다의 세계에서 생명체가 얼마나 밀집성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그 원시 생명체에 서식하는 바이러스가 존재했다면, 생명체 집단의 성장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바이러스가 유지되기에 충분한 밀집성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이러스는 언제부터 인간의 몸을 숙주로 서식하기 시작했을까? 600만 년 전, 아프리카 밀림 지역에서 인간이 침팬지와 분화하기 이전 공통조상이었던 시절부터 바이러스는 인간을 서식처로 정착했을 것이다. 그 당시 밀림 지역에는 포유류 동물뿐만 아니라 유인원 동물까지 생물학적으로 다양하게 존재했을 것이다. 그래서 동물종 간에 바이러스 교환이 간헐적으로 나타났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동물종에서 인간으로 바이러스가 넘어오는 경우도 발생했을 것이다. 다만, 그 당시 인간 조상의 집단 크기가 작았기 때문에, 바이러스 유행은 극히 제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간이 소수의 유목 집단생활을 하던 기간에도 마찬가지로 사람들 사이의 바이러스 유행은 거의 일어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경우 감염자를 사망하게 하거나, 생존하더라도 평생 면역을 획득하기 때문에, 소수의 인간 집단이 무리 지어 살아가는 유몽 생활환경에서는 바이러스 유행이 일어날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인류 초창기 시절 인간에게 존재할 수 있었던 바이러스는 인간의 생존에 큰 위협을 주지 않으면서도 장기간 감염을 유지할 수 있는 공생 관계를 유지하는 바이러스들이다. 예를 들면 헤르페스 바이러스(단순포진, 대상포진 등), 레트로 바이러스(에이즈 등), 파필로마 바이러스(사마귀 바이러스 등) 등이 초창기 인간 집단에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많은 전염병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바이러스가 인간 집단에서 주연배우(유행)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만 내지 2만 년 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인간이 유목생활을 버리고 세계 각지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하던 시기이다. 이때 인간 집단이 정착하면서 곡식을 재배하고 야생동물을 포획하여 가축화하기 시작했다. 먹을거리가 풍부해지고 정착 지역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인간은 대규모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경작과 가축사육은 주변에 잇는 각종 곤충, 해충과 설치류들을 몰려들게 만든다. 인구증가로 사람들 간 밀첩한 접촉이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축과의 접촉도 빈번해졌다. 이러한 환경적 대변화는 바이러스가 유행할 수 있는 푸시&풀 여건을 충족시켰다. 가축화하는 단계에서 동물로부터 바이러스 유입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사람들 사이에 바이러스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사람 생명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급성 감염 같은 바이러스가 유행할 수 있는 여건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무렵 출현한 것으로 알려진 바이러스로는 천연두 바이러스, 홍역 바이러스, 소아마비를 일으키는 폴리오 바이러스 등이 대표적이다. 천연두는 우리 조상들이 '마마'로 불렀을 만큼 가까이하기 두려운 공포의 대상이었다. 1980년 천연두 근절이 선언되기까지, 전세계에서 최대 5억 명이 천연두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천연두 바이러스가 약 1만 2,000년 전,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출현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최근 바이러스 유전자를 분석하여 진화 시기를 추정한 결과가 발표되었다. 최소한 3,000년 내지 4,000년 전, 아프리카 동북부 지역에서 낙타를 가축화하는 단계 중 낙타 두창 바이러스와의 공통조상에서 분화되어 생긴 바이러스로 추정되었다. 특히 약 3,300여 년 전, 천연두로 사망한 흔적이 있는 이집트 파라오 람세스 5세 미라에서 보듯이, 천연두가 상당히 오래전부터 인간 집단에서 유행한 것을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천연두는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기원후 6세기경 마한시대에 유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만큼 가장 오래된 전염병 역사를 가지고 있다. 소아마비를 일으키는 폴리오 바이러스의 경우에도 기원전 3,700년경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에 있는 점토판에 소아마비를 앓은 것으로 묘사된 사제 루마에서 알 수 있듯이, 농경 정착 시대에 인간 집단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그로부터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오늘 날 유행하는 많은 바이러스들은 인류 문명이 발달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대규모 전쟁과 집단 이주 및 신세계 개척 등을 통해 사람 집단에 유입되어 정착되었을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일부 바이러스들은 악역으로 등장하여 인류의 생존을 주기적으로 들었다 놨다 했다. 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그 대표적인 바이러스이다. 인플루엔자 독감의 역사에서 최악의 사태는 스페인 독감으로 알려져 있다. 스페인 독감은 1918년에 출현해서 단 1년 동안 최대 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인플루엔자 독감으로 과학적으로 확인된 것은 스페인 독감이 최초이지만, 그 이전에도 유럽에서 인플루엔자 독감으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기록들이 다수 존재한다. 이들 치명적인 인플루엔자 독감 바이러스는 야생조류가 가진 바이러스로, 돼지 등 중간 매개체 동물을 거쳐 신종 바이러스로 출현하여 인류 집단에서 대규모 판데믹 유행을 일으켰다. 판데믹 독감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대규모 유행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 집단에서 순환하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계절 독감의 형태로 매년 바이러스의 모습을 바꾸며 전 세계에 유행하면서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다. 아마도 계절 독감 백신을 접종하지 않는다면 전 세계적으로 계절 독감으로 인한 피해가 훨씬 크게 나타났을 것이다.

 

20세기 후반 이후 최악의 바이러스는 에이즈 바이러스가 될 것이 류력해 보인다. 이 바이러스는 아프리카 밀림지역 침팬지로부터 사람에게 넘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고 면역세포 속에 숨어 지낼 뿐만 아니라, 수시로 바이러스 껍데기를 바꾸는 매우 영악한 바이러스이다. 그래서 천연두와 달리 백신을 개발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7,000만 명 이상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됐고, 거의 4,000만 명 가까이 사망했다. 지금도 약 3,500여만 명이 감염된 채로 살아가고 있다. 이 바이러스가 출현한 근거지인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의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전 세계 에이즈 환자의 대부분이 이 지역에 몰려있다. 아직도 아프리카에서 에이즈 문제는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인류가 문명생활을 시작하면서 끊임없이 수많은 바이러스들로 인해 시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전염성을 가진다는 것이 전부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인간은 그냥 그 악마를 피하는게 상책이었다. 바이러스 존재를 인식하며 그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대처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20여 년 정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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