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군끼리 경쟁하기

2020. 4. 30. 12:40바이러스

2010년, 우리 연구팀은 닭에게 치명적인 뉴캐슬병을 예방할 수 있는 국산 백신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국내 백신업체들과 공동으로 진행했다. 조류에 서식하는 10여 개의 파라믹소 바이러스들 중 첫 번째 종으로 분류되는 이 바이러스는 일주일 내 양계장 닭들을 100% 죽일 수 있는, 매우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양계산업에서 공포의 대상이다. 주변 아시아, 중동 지역, 아프리카 등지에서 이 바이러스 유행으로 양계 피해가 속출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이 질병을 근절하는 데 성공한 것이 국내 양계산업에서는 그나마 다행이다.

 

뉴캐슬병 바이러스 중에는 닭에 매우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있는가 하면, 닭을 죽이지 않는 착한 바이러스들도 자연계에 존재한다. 우리 연구팀은 그런 착한 바이러스를 자연계에서 찾아내어 백신용 종자 바이러스를 개발하는 전략을 가지고 백신 개발 연구를 진행했다. 몇 년간의 노력 끝에 연구팀은 닭을 죽이지 않는 착한 바이러스를 오리에서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그다음 단계는 오리에서 분리한 바이러스를 순수 정제하는 것이었다. 자연 숙주 동물 개체에서 바이러스를 분리하면 같은 바이러스 내에서도 여러 아집단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아집 단군 중에서 백신 종자 바이러스로 가장 효과가 좋은 아집단을 순수 분리하여 선발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백신을 제조할 때마다, 생산된 바이러스의 백신 효능이 들쭉날쭉 불안정할 수도 있다. 예상대로 오리로부터 분리한 바이러스 내에는 여러 아집단 바이러스들이 혼재하고 있었다. 뉴캐슬병 바이러스는 닭의 혈구들을 엉겨 붙게 하여 마치 모래알처럼 응집되는 독특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실험실에서 각각 순수 정제한 아집단 바이러스들에 닭 혈구를 떨어뜨려 보았을 때, 아집 단별로 닭 혈구들을 응집시키는 성질이 제각각 다양하였다. 어떤 바이러스 아집단은 닭 혈구를 떨어뜨리자마자 바로 엉겨 붙어서 큰 덩어리로 보이는가 하면, 어떤 아집단 바이러스들은 엉겨 붙는 성질이 약해서 자세히 보아야 겨우 혈구가 엉겨 붙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바이러스 증식 능력이나 닭의 면역체계를 자극하는 능력이 아집 단군 별로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들을 아집 단별로 분석하고 백신 효능을 가장 잘 나타내는 아집단을 선발하여 백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 백신은 제품화를 거쳐 양계장에서 질병 예방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것은 백신 개발의 업적을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백신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보인 바이러스 내 존재하는 아집 단군의 다양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 마리의 오리에서 분리된 바이러스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들어있는 아집단 바이러스들은 다양한 증식 능력과 복제 능력을 보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비단 이 바이러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다른 바이러스종에서도 흔하게 관찰되는 현상이다.

 

바이러스가 숙주 몸속에서 일단 증식을 시작하게 되면, 숙주 면역체계의 공격과 같은 험악한 환경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다양한 아집단들은 매우 극단적인 차이는 아니지만 사소하면서도 미묘하게 서로 다른 생존 능력을 보이게 된다. 만약 숙주 면역체계의 공격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생존능력이 뛰어나게 되면 숙주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잇는 티켓을 부여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진행되다 보면 그 아집단 바이러스들은 바이러스 내에서 우점종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생존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아집단 바이러스들은 숙주 환경에서 점차 소멸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생존한 아집단 바이러스는 다시 다른 숙주 동물로 감염하여 동일한 과정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아집단 형성과 반복적인 선택은 결국 바이러스가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선택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하게 된다. 바이러스가 진화하는 게 아니라 바이러스 유전자가 진화하는 것이다.